국어 배경지식 K10과학 철학3분 · 누구나 열람

반증주의와 총체주의 — 과학은 무엇으로 참이 되는가

반증주의는 어떤 관찰이 나오면 자기 이론을 버리겠다고 미리 말할 수 있어야 과학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뜻만으로 참이 정해지거나 경험으로 검증되는 문장만 뜻이 있다고 본 논리실증주의, 검증의 단위를 지식 전체로 놓은 총체주의, 패러다임의 교체를 말한 쿤까지 한 줄로 이어진다.

한 사람이 실험 노트를 덮는다. 금속 막대를 달구고 길이를 재는 일을 백 번 했고, 백 번 다 늘어났다.

그래도 백한 번째가 같으리라고 적을 수는 없다. 아직 백한 번째를 보지 않았다. 과학은 관찰에 기대는데, 관찰은 언제나 유한하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을 근거로 참이라고 말하는가."

빈에 모인 사람들이 확인할 수 없는 문장을 밀어낸다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세상을 살펴보지 않아도 참이다. 말의 뜻만으로 참이 정해진다. 이런 명제를 분석 명제라고 한다.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뜻만 따져서는 참거짓이 갈리지 않는다. 세상을 확인해야 한다. 이런 명제가 종합 명제다. 노트에 적힌 백 줄은 모두 이쪽이다.

1920년대 빈에 모인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 구분을 기준으로 삼았다. 뜻이 있는 문장은 뜻만으로 참이 정해지거나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확인이 검증이다.

어느 쪽도 아닌 문장은 틀린 말이 아니다. 참거짓을 물을 수 없는 말이다. 세계의 근본을 묻는 형이상학의 문장들이 여기에 걸려 밀려났다.

늘어나지 않은 한 줄이 백 줄을 이긴다

그런데 검증은 처음의 실험 노트에서 막힌다. 모든 금속이 열을 받으면 늘어나는지는 모든 금속을 확인해야 안다. 노트에는 백 줄뿐이다.

포퍼는 방향을 뒤집었다. 아무리 많은 사례도 보편 명제를 증명하지 못하지만, 어긋나는 사례 하나는 그것을 무너뜨린다. 늘어난 백 줄은 아무것도 확정하지 못하고, 늘어나지 않은 한 줄은 전부를 끝낸다.

그래서 과학의 표지는 검증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반증할 수 있느냐다. 어떤 관찰이 나오면 자기 이론을 버리겠는지 미리 말할 수 있어야 과학이다.

무엇으로도 반박되지 않는 이론은 튼튼한 것이 아니라 과학 바깥에 있다. 이 뒤집기는 K09_과학철학_논리학의 기초의 모순 관계를 그대로 쓴 것이다.

그래도 둘이 밑바닥까지 갈라선 것은 아니다. 지식이 하나씩 쌓인다는 생각,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를 갈라 두는 전제는 함께 쥐고 있었다.

콰인이 분석과 종합을 가르던 선을 지운다

콰인은 밑돌을 건드렸다. 분석 명제는 뜻만으로 참이라는데, 두 표현의 뜻이 같다는 것부터가 무엇인가.

하나를 다른 하나로 바꿔 넣어도 참이 반드시 유지되면 같은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반드시'는 무엇인가. 분석적으로 참이라는 말이다. 설명이 제자리를 돈다. 선은 끝내 그어지지 않는다.

선이 없으면 검증도 낱개로 굴러가지 않는다. 노트의 한 줄에는 그 줄만 들어 있지 않다. 자가 정확하다는 가정, 막대가 그 금속이 맞다는 가정, 온도를 재는 방식이 함께 들어간다.

예측이 빗나가도 그중 무엇을 고칠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이론이 틀렸다고 해도 되고 자가 틀렸다고 해도 된다.

지식은 가장자리에서만 경험과 닿는 하나의 그물이고, 검증의 단위는 그물 전체다. 이것이 총체주의다.

그물 한가운데에는 논리와 수학처럼 좀처럼 건드리지 않는 중심부 지식이 있고, 가장자리에는 개별 관찰에 가까운 주변부 지식이 있다. 대개 중심부를 덜 흔드는 쪽을 고친다. 그래도 원리상 못 고칠 것은 없다.

과학자들은 한 줄 때문에 이론을 덮지 않는다

쿤은 실제 과학자들을 봤다. 노트에 늘어나지 않은 줄이 하나 생겼다고 그 자리에서 이론을 덮는 사람은 없다.

과학자들이 함께 쓰는 연장 묶음을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그 연장으로 풀리지 않는 관찰이 변칙 사례다. 이것이 쌓여 묶음 자체가 흔들릴 때 패러다임이 바뀐다.

새 패러다임과 옛것은 같은 말을 써도 뜻이 달라진다. 우열을 잴 공통의 자가 없다는 뜻에서 이것을 공약불가능하다고 한다.

정상과학이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고 왜 어긋난 값이 먼저 푸는 사람의 실패가 되는지는 E24_과학철학_과학은 무엇을 참이라 부르는가에서 더 자세히 갈라 놓았다.

물음이 한 줄에서 체계로 옮겨 간다

물론 뒤에 온 주장이 앞의 주장을 지우지는 않았다. 반증 가능성은 지금도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 쓴다.

달라진 것은 물음의 모양이다. 노트의 한 줄이 참인지 묻던 자리에, 어떤 체계를 어떤 조건에서 놓아줄지 묻는 물음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