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과 연성법 — 강제할 사람이 없는 규범과 은행 규제
국제법은 조약과 국제 관습법을 법원으로 삼아 나라와 나라 사이를 규율하는 법이다. 그 바깥에는 구속력이 없는데도 사실상 통용되는 연성법의 층이 있고, 은행의 건전성을 재는 바젤 기준의 자기자본 비율 규제가 그렇게 각국 법령 안으로 옮겨 앉는다.
한 나라의 은행 감독 기관 직원이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다. 가방에 든 것은 조약도 협정도 아니다. 각국 대표들이 모여 정리한 문서 한 부다.
지키겠다고 서명한 나라도 없다. 어겨도 벌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몇 해 안에 이 문서의 내용이 거의 모든 나라의 은행 법령에 들어간다.
국내법에는 위에서 누르는 힘이 있다. 국회가 만들고 법원이 판단하고 국가가 집행한다. 국제 사회에는 그 자리가 비어 있다. 나라들 위에 나라가 없다.
"그러면 국제법은 무엇에 기대어 법인가."
적어서 만든 법과 해 오면서 생긴 법이 갈린다
법이 흘러나오는 자리, 곧 법원은 두 군데다. 하나는 조약이다. 나라들이 문서로 합의한 것이고, 합의한 나라만 묶는다.
다른 하나는 국제 관습법이다. 여러 나라가 오랫동안 같은 방식으로 행동해 왔고 그것을 법적 의무로 믿어 왔다면, 그 관행과 확신이 합쳐져 문서 없이도 법이 된다. 이쪽은 합의한 적 없는 나라까지 묶는다.
앞은 문서가 먼저고, 뒤는 행동이 먼저다.
가방 속 문서가 둘 중 어디에도 못 낀다
서명한 나라가 없으니 조약이 아니다. 회의에서 새로 정리해 낸 것이니 오래된 관행도 아니다.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말은 어겨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지켜진다. 이렇게 구속력 없이 사실상 통하는 규범을 연성법이라 부른다.
신용을 잃을까 봐 각국이 먼저 옮겨 담는다
지키는 이유는 이익 쪽에 있다. 그 기준에 못 미치는 은행은 국제 금융 시장에서 신용을 얻지 못한다. 거래 상대가 꺼리고 돈을 빌려 오는 값이 오른다.
각국 감독 기관도 자기 나라 은행이 밖에서 불이익을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문서의 내용을 자국 법령에 옮겨 담는다. 그 순간 구속력이 없던 기준이 국내법의 옷을 입고 강제력을 얻는다.
가방에서 나온 종이가 조문이 되어 돌아오는 셈이다. 은행이 서 있는 그 국제 금융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K17_경제_환율과 국제금융으로 이어진다.
같은 돈을 어디에 넣었느냐로 비율이 갈린다
그 문서가 담은 것은 하나의 계산이다. 은행은 대부분 남에게서 받은 돈으로 굴러간다. 손실이 나면 예금자가 먼저 다친다. 그래서 자기 돈을 얼마나 깔고 있느냐를 잰다.
굴리는 자산마다 떼일 위험이 큰 것에는 큰 가중치를, 작은 것에는 작은 가중치를 매겨 더한다. 이것이 위험 가중 자산이다. 자기자본을 이 값으로 나눈 것이 자기자본 비율이고,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은행은 8퍼센트 이상이어야 한다.
눈여겨볼 곳은 분모다. 분모는 자산의 액수가 아니다. 떼일 걱정이 거의 없는 자산은 가중치가 낮아 아무리 사도 분모가 별로 늘지 않는다. 기업에 내준 대출은 신용도가 낮을수록 크게 실린다.
안전한 자산만 들고 있는 은행과 같은 액수를 기업 대출로 내준 은행은, 굴리는 돈이 같아도 비율이 다르게 나온다.
처음에는 자산 종류마다 가중치를 하나로 정해 두고 떼일 위험만 따졌다. 뒤에는 같은 종류라도 신용도를 갈라 보고, 시장 가격이 움직여 생기는 손실과 사고나 잘못으로 생기는 손실까지 분모에 넣었다.
떼일 가능성을 확률로 바꿔 값을 매기는 셈법은 K16_경제_위험과 정보의 경제학과 뿌리가 같다.
이익이 사라지는 자리에서 이 구조가 멈춘다
물론 연성법이 늘 이렇게 굴러가지는 않는다. 지키는 편이 이익인 분야에서만 통한다. 환경이나 인권 쪽에서는 지키는 나라가 오히려 손해를 본다. 그런 자리에는 선언만 쌓인다.
그래서 국제 규범을 다루는 글은 구속력이 있느냐보다 왜 지켜지느냐를 묻는다. 가방 속 문서가 법령이 된 것도 연성법이라서가 아니다. 지키는 편이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답은 규범 안이 아니라 지키는 쪽이 얻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