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배경지식 E21철학/법/정치3분 · 누구나 열람

심신 문제와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 주체·의식·몸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는 마음이 머릿속에 갇혀 있지 않고 몸의 움직임과 도구, 매체에 걸쳐 작동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근대적 주체를 만든 일기와 편지, 지각과 행위의 되먹임 고리, 심신 문제(mind-body problem)가 여기서 만난다.

한 사람이 밤에 일기를 쓴다.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이다.

그런데 쓰다 보면 하루 종일 뭉쳐 있던 것이 문장이 된다. 그 문장을 읽는 또 하나의 자기가 생긴다. 낮에 몰랐던 이유를 쓰다가 알기도 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무언가를 공개한다는 말이 성립하는가.

편지와 일기가 자기를 들여다보는 습관을 만든다

근대적 주체성(subjectivity)은 그런 매체에서 자랐다. 주체성이란 자기를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바라보는 태도다. 편지와 일기가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를 살피는 자기 점검(self-inspection)의 습관을 얻었다.

그 습관 위에 스스로 판단하는 계몽된 주체(enlightened subject)라는 이미지가 얹혔다.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먼저 있어야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public/private sphere)의 구분도 이때 잡힌다. 사적인 곳은 공적인 것의 나머지가 아니었다. 광장에서 말할 자기를 먼저 만들어 내는 자리였다.

밤에 쓴 일기가 낮에 할 말을 만든다. 쓰는 일이 생각의 방식을 바꿔 놓는다는 이야기는 E27_언어문자_쓰기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나에서 문자와 인쇄의 역사로 이어진다.

눈이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새로 오지 않는다

눈은 카메라처럼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금 시야에 없는 것을 알려면 고개를 돌려야 하고,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지각은 가만히 받는 일이 아니라 행위를 요구하는 일이다. 움직임이 새 정보를 만들고 그 정보가 다음 움직임을 정한다. 지각과 행위의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 of perception and action)다.

일기에서 이미 겪은 구조다. 한 줄을 쓰면 몰랐던 것이 보이고, 보이면 다음 줄이 달라진다.

뇌가 지각을 여러 부서로 나눠 처리한다는 실험 쪽 이야기는 주의와 지각의 분업(attention) — 뇌는 하나가 아니다에 있다.

버튼이 사라지고 캐릭터가 내 몸이 된다

게임 화면 앞에서 이 고리가 더 뚜렷해진다. 처음에는 손이 버튼을 찾는다. 몇 분이 지나면 버튼은 의식에서 사라지고, 캐릭터가 벽에 부딪히면 자기가 부딪힌 것 같다.

조작 장치를 거쳐 한 단계 떨어져 있는데도 지각 체계가 그 너머까지 뻗는다. 일기를 쓰는 손에서 펜이 사라지고 문장만 남는 것과 같다.

게임은 플레이어의 현실과 따로 도는 내적 모형(internal model of reality)을 갖는다. 그 세계에 닿는 길은 아바타의 몸이 할 수 있는 행동뿐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 몸인지가 무엇이 지각되는지를 정한다. 체화된 인지라 부르는 관점이다.

밤의 그 느낌 앞에서 철학과 과학이 만난다

남은 문제가 의식(consciousness)이다. 물질인 뇌에서 어떻게 무언가로 느껴지는 상태가 나오는가. 일기를 쓰는 동안 무언가가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아직 빈칸이다.

마음과 물질의 관계를 묻는 이 심신 문제를 철학은 오랫동안 개념을 따지고 논증을 세우는 비경험적 접근으로 다뤘다. 그것만으로는 닿지 않는다.

뇌의 어느 부분이 손상되면 어떤 경험이 사라지는지는 실험으로만 안다. 신경과학의 몫이다.

반대로 측정만으로도 안 된다. 무엇을 의식으로 셀지 정해져야 측정할 것이 정해진다. 일기를 쓸 때 드는 그 느낌을 무엇이라 부를지부터 정해야 한다. 의식 연구가 학제적일 수밖에 없고, 철학이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에 필요한 이유다.

마음이 머릿속 바깥으로 새어 나간다

물론 이 셋을 한 이론으로 묶을 수는 없다. 주체는 역사의 문제고 지각은 몸의 문제며 의식은 아직 답이 없는 문제다.

마음을 안에 든 무엇으로 두는 한, 자기를 자기에게 공개한다거나 지각이 행위를 요구한다는 말은 어색하게 들린다. 마음이 매체와 몸과 도구에 걸쳐 있다고 보면 그제야 평범한 문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