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와 노동(automation) — 기술이 바꾸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관계
자동화(automation)는 사람을 밀어내기만 하지 않고 남은 자리의 성격을 바꾼다. 산업자본주의가 노동 시간을 구획하며 여가를 낳았듯, 기술이 옮기는 것은 기계의 성능이 아니라 사람들의 배치이고 장인 정신(craftsmanship)의 조건도 거기서 갈린다.
이어폰 한쪽이 안 들린다. 수리점에 가져가니 새로 사는 게 낫다고 한다. 부품값보다 뜯어서 맞추는 품이 더 든다.
고칠 줄 아는 사람이 사라진 게 아니다. 고치는 일이 값에 안 맞게 됐을 뿐이다.
기술을 다루는 글은 기계 이야기처럼 보인다. 정작 다루는 것은 그 기계가 사람 사이에 새로 짜 놓은 배치다.
"무엇이 가능해졌나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하게 되었나."
시계가 하루를 자르자 없던 시간이 생긴다
농사를 짓던 시절 일의 단위는 수확 주기였다. 해가 길면 오래 일하고 비가 오면 쉬었다.
산업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는 이것을 시계에 맞춰 바꿨다. 일은 정해진 시각에 시작해 정해진 시각에 끝난다. 구획된 노동 시간이다. 그 수리점도 아홉 시에 열고 여섯 시에 닫는다.
그러자 없던 것이 따라 생긴다. 일이 아닌 시간, 곧 여가다. 문 닫은 뒤의 시간은 그냥 남는 시간이 아니라 일의 반대편으로 새로 생긴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에 값이 붙는다. 쉬는 시간을 채워 줄 것을 판다는 말이다. 여가의 상품화(commercialization of leisure)는 산업 노동의 반대편이 아니라 그 부산물이다. 그 상품이 지금은 사람의 관심 자체로 옮겨 갔다(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 정리 — 공짜 서비스의 진짜 상품은 나).
이어폰을 뜯으려면 안쪽 전부를 알아야 한다
분업(subdivision of labour)도 관계를 갈랐다. 대장장이는 쇠를 고르는 일부터 마무리까지 다 알았다. 공정이 쪼개지자 만드는 지식이 조각났다.
그런데 고치는 일은 그렇게 쪼개지지 않는다. 망가진 물건을 되살리려면 부품들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설계자가 무엇을 노렸는지를 통째로 되짚어야 한다.
이어폰을 뜯은 사람은 부품이 왜 그 자리에 붙어 있는지까지 안다. 라인에서 한 부품만 끼운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 만든 사람보다 고치는 사람이 물건 전체를 더 잘 아는 일이 그래서 생긴다.
이어폰을 찍어 내는 라인에 사람이 한 명 남는다
기계가 대부분을 처리하면 사람에게 남는 일은 지켜보기다. 오래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일인데 사람은 그것을 잘 못한다. 기계가 잘하는 것만 기계에 주고 나머지를 사람에게 미루면 이렇게 된다.
그 라인에서 사람이 하는 일은 부품을 붙이기가 아니라 잘못 붙은 것을 알아채기다. 문제가 터진 순간의 판단도 그 사람 몫이다. 해고를 면한 사람이 재교육을 받아도, 옮겨 간 것은 기술만이 아니라 실패의 책임이다.
뜯어 보고 싶은 마음은 남았는데 자리가 없다
장인 정신은 취미의 문제가 아니다. 일을 그 자체를 위해 잘 해내려는 욕구는 대개의 사람에게 있다. 잘했는지 아닌지도 취향이 아니라 객관적 기준으로 잰다.
없는 것은 욕구가 아니라 그 욕구를 펼 자리다. 이어폰을 뜯어 고쳐 보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수리점이 그렇게 말한 게 아니다.
버린 이어폰이 어딘가에서 다시 켜진다
물론 이 모두를 기술 탓으로 돌리면 틀린다. 같은 기계가 어떤 사회에서는 노동 시간을 줄이고 어떤 사회에서는 감시를 늘린다.
사물의 생애(lifecycle of objects)도 만들어짐에서 버려짐으로 곧게 나아가지 않는다. 버려진 뒤에 다시 팔리고, 부품으로 뜯기고, 다른 나라에서 더 오래 쓰인다.
그 뒤의 삶까지 좇는 사물의 생애사(biography of things)는 훨씬 구불구불하다. 남은 물건으로 지나간 삶을 되짚는 시선도 같은 자리에서 나온다(E31_인류학_과거는 발견되지 않고 선택된다).
버리기로 한 그 이어폰도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고칠지 버릴지를 정한 게 물건의 상태가 아니었듯, 그다음에 어디로 가는지도 물건을 둘러싼 사람들이 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