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투영법과 등고선(map projection) — 공간은 중립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투영법(map projection)은 둥근 지구를 평면에 옮기면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왜곡할지 미리 정해 두는 규칙이다. 축척과 범례, 등고선과 위성 해상도, 나아가 건축의 공간 구성까지 공간을 담는 형식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선택이 들어 있다.
교실 뒤에 세계지도가 걸려 있다. 그린란드가 아프리카만큼 커 보인다. 실제로는 아프리카가 열네 배쯤 넓다.
지도가 틀린 것은 아니다. 둥근 것을 평평하게 펴려면 어딘가는 늘어난다. 그 지도는 고위도를 늘리는 쪽을 택했을 뿐이다.
택했다는 말이 중요하다. 지도는 세상을 옮겨 담은 게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보일지 고른 결과다.
"그 선택은 누가, 무엇을 위해 했나."
그린란드를 부풀리는 대신 지도가 다른 것을 지킨다
투영법(projection system)이 첫 번째 선택이다. 둥근 껍질을 어떻게 펴서 종이에 붙일지 정하는 규칙이다. 어느 지역을 한가운데 놓을지, 면적과 방향 중 무엇을 지킬지가 여기서 갈린다.
축척(scale)은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남길지 정한다. 범례(legend)는 남긴 것들 가운데 무엇을 같은 항목으로 묶을지 정한다. 어떤 국경은 굵게 그리고 어떤 길은 아예 지운다.
교실 뒤의 그 지도에 우리 동네는 없다. 없는 동네가 아니라 그 축척에서 지우기로 한 동네다.
자로 그은 듯한 지도가 주장을 사실처럼 실어 나른다
지도는 자를 대고 그린 듯 객관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거기 실린 세계관도 주장이 아니라 사실로 읽힌다. 지도를 비판적으로 읽는 연구가 짚는 대목이다.
가장 세게 작동하는 주장은 주장처럼 보이지 않는 주장이다. 어느 문명을 한가운데 놓고 나머지를 변두리로 미는 이 시선은 E30_인류학_서구의 잣대로 잴 수 없다에서 문화상대주의가 겨눈 바로 그 습관이다.
등고선 간격을 바꾸자 같은 산이 순해진다
지형을 나타내는 등고선(contour line)은 같은 높이의 점을 이은 선이다. 선이 촘촘하면 가파르고 성기면 완만하다. 봉우리는 동심원처럼 보인다.
연속된 높이를 몇 미터 간격으로 잘라 선으로 바꾼 약속이다. 그러니 간격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같은 산이 험해지기도 순해지기도 한다. 그린란드가 부푼 것과 같은 일이 산에서도 일어난다.
위성 원격탐사(satellite remote sensing) 영상에서도 해상도는 한 종류가 아니다. 한 화소가 땅의 얼마를 담느냐는 공간 해상도이고, 같은 지역을 며칠 만에 다시 찍느냐는 시간 해상도다.
도시가 어떻게 번져 갔는지를 보려면 아주 선명한 한 장보다 자주 찍은 여러 장이 낫다. 무엇을 보려 하느냐가 어느 해상도를 고를지 정한다.
교실 문이 뒤에 있고 책상이 한쪽을 본다
건축은 비를 막는 기술에서 출발했지만 곧 그 이상을 담았다. 어디로 들어가고 어디서 멈추고 누가 어디에 서는지를 정하는 공간 구성(spatial organization)은 그 사회의 의례를 굳혀 놓는다.
지도가 걸린 그 교실이 그렇다. 앉는 방향 하나가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지를 정해 둔다. 같은 넓이의 방이라도 문과 단의 위치에 따라 그 방이 만드는 상징적 배경이 달라진다.
로마의 비트루비우스는 건축가에게 손기술과 글로 익히는 학문이 함께 필요하다고 썼다. 손기술만 익힌 사람은 제 설계에 걸맞은 권위에 이르지 못하고, 이론에만 기댄 사람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를 좇는다.
건물 하나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누구의 하루에 맞춰 짜였는지는 도시 교통과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 — 도시는 어떻게 움직이고 팔리는가에서 교통과 관광의 문제로 이어진다.
물론 관점이 담긴다는 말이 아무 지도나 다 마찬가지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투영법은 특정 목적에 분명히 더 정확하다.
도면을 그린 사람은 그 복도를 걸어 본 적이 없다
병원을 짓는다면 그 건물을 실제로 쓸 사람, 곧 간호사와 청소 담당자와 환자에게 물어야 한다. 하루에 몇 번 어느 복도를 오가는지는 도면 위에 안 나온다.
그 교실을 그린 도면에도 거기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없다. 지도가 무엇을 지웠는지 묻는 일과 같은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