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와 서사(fiction) — 지어낸 이야기가 진실에 닿는 법
허구(fiction)는 현실의 반대편이 아니라 현실이 두 번 걸러진 결과다. 작가의 의식과 세계관이라는 두 필터를 지나며 세계가 추려지고, 사실을 다루는 역사 서술(historical representation)에서도 해석은 하나로 줄지 않고 늘어난다.
한 사람이 소설을 덮고 검색창에 작가 이름을 친다. 방금 읽은 일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다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조금 전에 받은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없었던 일이 어떻게 있었던 일보다 정확할 수 있나.
소설이 된 세계가 두 개의 필터를 지난다
허구 세계(fictional world)는 무에서 나오지 않는다. 바깥에는 정리되지 않은 무한한 혼돈이 있다.
그것이 먼저 한 사람의 의식이라는 필터(filter)를 지난다. 사람은 자기가 겪을 수 있는 만큼만 겪는다.
그다음 세상이 어떻게 굴러간다고 믿는지, 곧 작가의 세계관(worldview)이라는 두 번째 필터를 지난다. 한 번 걸러진 것이 여기서 다시 추려지고 배열된다.
그래서 허구는 현실의 반대편이 아니다. 현실이 두 번 걸러진 결과다. 검색창을 연 그 사람이 소설에서 받은 것도 세계 자체가 아니라 두 번 걸러진 세계다.
겪은 사람은 빠지고 주인공만 남는다
걸러 내는 일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작가는 자기가 겪은 일을 소설로 옮기면서 그 경험을 자기 아닌 주인공(protagonist)에게 넘긴다.
실제 사건을 극화할 때는 남의 일로 만들어야 오히려 객관성을 얻는다. 안에서만 아는 지식은 그대로 남고, 자기 연민만 떨어져 나간다.
그 소설이 작가가 겪은 일에서 나왔어도 검색창에는 그 일이 그대로 뜨지 않는다. 겪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 일은 이제 주인공 몫이다.
같은 전쟁을 두고 서른 권이 나란히 선다
역사도 재현이다. 일어난 일을 골라 말로 다시 세워 놓았다는 뜻이다.
과학은 오류를 걸러 내며 하나의 답에 가까워진다고들 여긴다. 틀린 것을 하나씩 지우며 참에 다가간다는 뜻에서 진실에 대한 근사다.
역사 서술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사료가 늘고 연구가 쌓일수록 해석은 줄지 않고 늘어난다. 서른 권 가운데 어느 것도 앞의 것을 지우지 못한다. 검색창에 전쟁 이름을 쳐도 목록이 짧아지지 않는 것과 같다.
정확해 보일수록 한 사람의 눈이 숨는다
그래서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틀린 서술이 아니라 정밀함의 환상(illusions of precision)이다. 각주가 촘촘할수록 그 뒤에 한 사람의 선택이 있었다는 사실이 잘 안 보인다.
무엇을 무엇으로 옮기는 일이 재현인가. 이 물음은 회화와 사진을 두고 먼저 나왔다(재현과 표현(representation) — 예술은 현실을 베끼지 않는다).
검색창을 열지 않고 그냥 웃는 자리가 있다
농담을 들을 때 듣는 사람은 그 말이 사실인지 따지는 스위치를 잠시 끈다.
이 인지적 이탈(cognitive disengagement) 덕분에 이야기꾼은 마음껏 부풀린다. 지어내도 봐주기로 한 이 여유를 코믹 라이선스(comic licence)라 한다. 시인이 문법과 사실을 어겨도 되는 시적 허용과 같은 구조다.
사실이냐고 따지기 시작하면 농담은 이미 끝난다.
가사가 시의 자리로 걸어 들어온다
작사가는 3분짜리 노래 안에서 반복과 비유와 심상을 쓴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라는 점에서 시와 다르지 않다.
낮게 보던 것이 예술의 목록에 들어오는 이 일은 영화가 먼저 겪었다(영화와 몽타주(montage) — 카메라가 만드는 새로운 현실).
물론 걸러졌다는 말이 정확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필터가 둘이면 왜곡될 통로도 둘이다. 작가의 세계관이 좁으면 걸러진 뒤에 남는 것도 좁다.
지어낸 이야기를 읽을 때 물을 것은 이것이 사실이냐가 아니다. 무엇이 걸러져 나갔고 무엇이 남았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