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몽타주(montage) — 카메라가 만드는 새로운 현실
몽타주는 따로 찍은 장면을 이어 붙여 현실 어디에도 없던 영화적 시공간을 만드는 방식이다. 영화의 값을 실제의 기록에서 찾을지 지어낸 환상(irrealism)에서 찾을지를 두고 영화론은 오래 갈렸다.
한 남자가 창밖을 내다본다. 다음 화면에 아이가 뛰어논다. 다시 남자의 얼굴.
관객은 그가 아이를 보며 무언가 떠올렸다고 읽는다. 그러나 두 장면은 다른 날 다른 도시에서 따로 찍혔을 수 있다. 남자는 그 아이를 본 적이 없다.
붙이기 전에는 없던 것이 붙이고 나서 생긴다면,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남자와 아이가 필름 위에서만 만난다
감독은 현실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따로 찍은 조각을 이어 붙여 현실 어디에도 없던 영화적 시공간(filmic time and space)을 만든다. 이것이 몽타주다.
남자와 아이가 같은 창을 사이에 두는 그 시공간은 필름 위에만 있다. 같은 계단을 세 번 이어 붙이면 관객은 그 계단이 유난히 길었다고 느낀다. 시간도 그렇게 필름 위에서 늘고 준다.
현실에 가까워질수록 손댈 자리가 줄어든다
그래서 초기 영화이론가들은 소리와 색을 반대했다. 소리와 색이 붙으면 영화가 현실에 바짝 붙는다고 봤다.
대상을 옮겨 담는 그릇을 재현의 매체(medium of representation)라 한다. 그 그릇이 대상과 어긋나는 자리에서 예술이 생긴다는 생각이다. 무성과 흑백은 결핍이 아니라 형식이었다. 남자의 얼굴에 아무 대사도 얹히지 않으니 관객이 그 표정을 스스로 채워 넣는다.
이 생각은 재현과 표현(representation) — 예술은 현실을 베끼지 않는다의 재현과 표현 이야기와 한 줄기다.
있었던 일이냐 지어낸 일이냐로 진영이 갈라선다
한쪽은 카메라가 실제 일어난 일(actuality)을 붙잡아 둔다는 데서 영화의 값을 찾는다. 있었던 일에 무게를 두는 이 입장을 리얼리즘이라 한다.
다른 쪽은 현실 아닌 것을 지어내는 힘에서 찾는다. 비현실성과 환상적 차원(fantasmatic dimension)이다.
창밖의 남자도 실제로 찍힌 사람이고 아이도 실제로 찍힌 아이다. 다만 둘이 만난 일만은 일어난 적이 없다. 영화의 값이 앞쪽에 있는지 뒤쪽에 있는지에서 갈린다.
익숙한 음악이 낯선 화면을 견디게 한다
영화 음악(musical score)은 익숙한 구조와 종지를 쓴다. 화면이 아무리 낯설어도 귀는 이미 아는 진행을 따라간다.
그 익숙함이 알아볼 수 있는 맥락이 된다. 그 맥락이 관객을 낯선 세계 안으로 들여보낸다. 뻔한 음악이 창의성을 깎는 것이 아니라 낯선 것을 견디게 한다.
관객이 남자 자리에 앉는 순간 판단도 따라 앉는다
대중영화는 지배 문화(dominant culture)를 재생산한다. 누가 주인공이 될 만한 사람이고 무엇이 좋은 결말인지, 그 문화적 지시가 줄거리에 실려 온다.
강요가 아니라서 잘 먹힌다. 관객은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즐겁게 받아들인다.
관객은 창밖의 그 남자를 자기 자리에 놓고 본다. 그러는 동안 그 남자가 무엇을 그리워할 만한 사람인지까지 같이 넘어온다.
소설이 하는 일과 영화가 하는 일이 갈린다
각색(adaptation)이 이 구조를 잘 보여 준다. 배경과 시대를 바꿔도 이야기의 뼈대, 곧 근본 서사(fundamental narrative)가 남으면 관객은 같은 이야기를 봤다고 느낀다.
반대로 원작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각색이 원작을 배반하기도 한다. 소설이 쓰는 수단과 영화가 쓰는 수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어낸 이야기가 어떻게 진실에 닿는지는 허구와 서사(fiction) — 지어낸 이야기가 진실에 닿는 법에서 서사의 문제로 다시 나온다.
물론 자르는 것만이 영화는 아니다. 카메라를 켜 둔 채 시간을 자르지 않는 감독도 있다. 창밖의 남자를 자르지 않고 몇 분이고 그대로 비추는 쪽이다.
다만 그것도 붙이지 않기로 한 선택이고, 관객은 그 지속을 하나의 의미로 읽는다.
영화를 볼 때 남는 물음은 화면에 무엇이 찍혔는가가 아니다. 어디서 잘렸고 무엇 다음에 놓였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