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배경지식 E06예술미학3분 · 누구나 열람

재현과 표현(representation) — 예술은 현실을 베끼지 않는다

재현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화면 위에 닮게 옮기는 일이고, 표현(expression)은 대상 앞에 선 사람의 상태를 드러내는 일이다. 사진이 나온 뒤 회화의 무게중심은 재현에서 표현 쪽으로 옮겨 갔다.

한 사람이 미술관에서 걸음을 멈춘다. 액자 안에는 색 덩어리와 선 몇 개뿐이다.

두 방 건너에는 실제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초상화가 걸려 있다. 두 그림 사이에는 백 년이 있다.

그 백 년 동안 그림은 무엇을 그만두었나.

얼마나 닮았느냐로 화가의 실력을 잰다

오랫동안 그림의 기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닮게 옮기는 데 있었다. 대상을 화면 위에 다시 세우는 이 일이 재현이다. 두 방 건너의 초상화가 그 일을 하고 있다.

자연을 흉내 내어 그대로 옮기는 일, 곧 모방이 실력을 재는 자였다. 있는 그대로 옮긴 듯 보이는 화면도 실은 고르고 세운 결과다. 같은 물음이 E28_미디어_뉴스는 현실이 아니라 구성물에서 뉴스를 두고 되풀이된다.

기계가 더 빨리 해내자 회화에 다른 몫이 남는다

19세기 전반에 사진이 나왔다.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일을 기계가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해냈다.

회화는 그 일을 빼앗겨 위기에 몰렸고, 동시에 그 일에서 풀려났다. 남은 몫은 기계가 못 하는 쪽이다.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아니라 대상 앞에 선 사람의 상태를 드러내는 일, 곧 표현이다.

관람객이 걸음을 멈춘 그 액자가 이 이동의 끝자락에 있다. 형태를 아예 놓아 버린 추상 회화(abstract painting)다.

회화를 밀어낸 그 기계가 움직임을 얻어 현실에 없던 시공간을 지어내는 자리는 영화와 몽타주(montage) — 카메라가 만드는 새로운 현실에서 이어진다.

삼천 년 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은 조각이 있다

같은 미술관 더 안쪽 방에 이집트 조각이 놓여 있다. 정면을 향하고, 팔은 몸에 붙이고, 왼발만 앞으로 내민다.

이 자세는 솜씨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오래 견디도록 짜 놓은 틀이다. 이렇게 짜인 틀을 형식이라 한다.

미술사에서 기념비성(monumentality)은 크기와 상관이 없다. 거대한 돌더미로 쌓은 전쟁 기념비보다 손바닥만 한 이집트 조각이 더 기념비적이다. 바깥의 부피가 아니라 안에 실린 무게, 산맥처럼 태고의 돌로 빚은 듯한 무게가 기념비성을 만든다.

대부분이 그렇다는 말이 정의로 둔갑한다

세계 음악 문화의 대부분은 음높이를 정해진 계단으로 잘라 써 왔다. 고정된 음고(fixed pitches)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다는 말은 일반화이지 음악의 정의가 아니다. 일본의 샤쿠하치와 한국의 산조는 정해진 음 언저리에서 흔들리며 미끄러진다(fluctuating frequencies). 반례가 하나만 있어도 정의는 무너진다.

초상화의 얼굴이 상황을 만나야 감정이 된다

두 방 건너의 초상화에서 얼굴만 떼어 놓고 보면 그 표정이 무엇인지 정해지지 않는다. 눈물은 슬픔일 수도 안도일 수도 있다.

상황과 맥락이 주어지고 그 사람에게 무엇이 걸려 있는지를 알 때 표정은 비로소 하나의 감정이 된다. 액자 옆에 붙은 제목 한 줄이 같은 얼굴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 것도 그래서다.

감각으로 드러난 것이 어떻게 정신의 내용을 실어 나르는가. 이 물음을 헤겔 변증법 정리 — 지양과 절대정신, 예술의 자리는 미학의 언어로 다시 묻는다.

셀피가 옛 형식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자화상(self-portrait)도 얼굴의 기록이기 전에 그려진 사람의 자리를 세우는 형식이었다. 오늘 수억 장씩 찍히는 셀피는 그 형식이 전 지구적 시각문화(global visual culture)로 옮겨 앉은 자리다. 미술관을 나오며 찍는 한 장도 거기에 들어간다.

물론 재현에서 표현으로라는 줄기는 서양 회화를 뒤에서 정리한 서술이다. 이집트인은 애초에 닮게 그릴 생각이 없었고, 사진이 나온 뒤에도 재현을 놓지 않은 화가가 더 많았다.

그림 앞에서 물을 것은 무엇을 닮았는가가 아니다. 무엇을 어떤 형식으로 붙들어 두려 했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