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정리 — 지양과 절대정신, 예술의 자리
변증법은 어떤 규정과 그것에 맞서는 규정이 부딪히며 둘 다를 품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는 정신의 운동이다. 헤겔은 그 도달점을 절대정신이라 부르고, 그 세 형태를 예술과 종교와 철학으로 나누어 예술을 가장 아래에 두었다. 그 자리 매김에 미학의 반론이 붙는다.
한 사람이 박물관에서 그리스 조각 앞에 오래 서 있다. 돌인데 살처럼 보인다. 설명문을 읽지 않아도 무엇이 대단한지 알겠다는 느낌이 온다.
헤겔은 바로 그런 순간을 두고, 저것이 아름다움이 도달한 자리이면서 동시에 지나간 자리라고 했다.
"감각으로 아는 것과 개념으로 아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깊은가."
정신이 돌에 자기를 새겨 놓고 그 앞에 선다
칸트는 인식의 조건을 우리 쪽에서 찾고 그 너머를 알 수 없는 자리로 남겨 두었다. 헤겔은 그 남겨진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신은 자기가 세운 것을 대상으로 마주한다. 그러고는 그것과 부딪히면서 자기를 알아 간다. 사람이 돌에 자기 뜻을 새겨 놓고 그 앞에 서서 다시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이 과정 전체가 하나의 운동이다. 그 운동의 방식이 변증법이다. 맞서는 것과 부딪혀 한 단계 올라서기를 되풀이하는 걸음이다. 인식의 형식을 주체 쪽에서 찾은 칸트 인식론 정리 — 인식의 조건과 자아의 동일성의 틀을 이어받되, 알 수 없는 영역을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갈라선다.
맞선 둘이 함께 한 칸 위로 올라선다
어떤 규정이 놓이면 그것과 맞서는 규정이 따라 나온다. 그렇다고 뜨거운 물과 찬물을 섞어 미지근하게 만드는 절충도 아니다.
앞의 둘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간직한다. 그 부정에서 둘 다를 품는 더 높은 단계가 열린다.
이 겹친 작용을 지양이라 한다. 버리는 동시에 간직해 올린다는 말이다. 종합은 양을 나누어 갖는 일이 아니라 질이 올라서는 일이다.
조각 앞에 선 사람이 세 단계를 차례로 겪는다
이 운동이 향하는 도달점을 헤겔은 절대정신이라 불렀다. 정신이 절대적 진리인 이념을 스스로 인식하는 영역이다. 예술과 종교와 철학이 모두 여기 속하고, 인식 형식이 달라 단계가 갈릴 뿐이다.
그 인식 형식이 셋이다. 감각으로 곧바로 받아들이는 직관, 이미지와 이야기로 마음에 떠올리는 표상, 개념으로 붙잡는 사유다.
돌이 살처럼 보인다는 첫 느낌이 직관이다. 그 조각에 얽힌 옛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 표상이고,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말로 붙잡는 것이 사유다.
이 셋은 나란히 놓이지 않는다. 아래에서 위로 수렴한다. 예술이 직관하고 종교가 표상하며 철학이 사유한다.
그리스 조각이 맨 아래 칸으로 내려간다
예술은 진리를 감각적인 형태에 담는다. 그런데 감각에 매여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셋 가운데 가장 아래에 놓인다.
헤겔이 예술을 두고 지나간 것이라 말한 까닭이 여기 있다. 예술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정신이 자기를 아는 최고의 방식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온다는 뜻이다.
박물관의 그 조각은 여전히 사람을 붙잡아 세운다. 다만 헤겔의 체계에서 그것이 알려 주는 진리는 개념이 알려 주는 것보다 아래 칸에 있다.
머릿속에 있던 것이 돌로 깎여 나온다
미학 쪽은 거꾸로 본다. 예술의 감각적 지각성은 덜 자란 단계의 표시가 아니라 예술의 객관성을 이루는 본질인데, 종합이라는 단계에서 그것이 완전히 소거된다.
개념으로 붙잡은 정신은 머릿속에 머문다. 예술은 그것을 다시 감각할 형태로 내놓는다. 그래서 여럿이 함께 마주한다. 이 되돌려 놓는 작업을 재객관화라 한다.
조각이 그 일을 한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던 것이 돌로 깎여 나온다. 이천 년도 더 지나 박물관에 들어선 낯선 사람 앞에도 그대로 놓인다.
그렇다면 예술은 철학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의 맨 아래 칸이 아니라, 철학이 이룬 완전한 주관성을 다시 객관으로 돌려놓는 '철학 이후'의 칸에 놓일 후보가 된다. 감각적 형태로 내놓는 그 작업이 현실을 옮겨 적는 일이 아니라는 논의는 재현과 표현(representation) — 예술은 현실을 베끼지 않는다의 재현과 표현 논쟁으로 이어진다.
헤겔의 원칙이 헤겔에게 되돌아온다
종합이 질적 고양이라면, 예술이 철학에 흡수되어 남는 것이 없는 체계는 지양이 아니라 제거다. 자기가 세운 규칙을 자기 미학에서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인 셈이다.
물론 정립과 반정립과 종합이라는 세 박자 도식은 헤겔 자신이 즐겨 쓴 용어가 아니다. 후대가 그의 서술을 요약하며 굳힌 표현이다. 실제 헤겔의 전개는 그보다 훨씬 덜 규칙적이다. 다만 대립을 통과해 더 높은 단계로 간다는 원칙만은 그의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