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배경지식 E18철학/법/정치3분 · 누구나 열람

구성적 규칙과 저작권(constitutive rule) — 규칙은 무엇을 하는가

구성적 규칙(constitutive rule)은 이미 있는 행위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을 지키는 일 자체가 하나의 행위를 만들어 내는 규칙이다. 저작권이 착상이 아니라 표현만 지키는 이유, 특허와 영업비밀의 맞바꿈, 정보 공개형 규제가 같은 물음에서 갈린다.

한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 영상으로 올린다. 며칠 뒤 영상이 내려간다. 저작권(copyright)을 침해했다는 통보가 붙는다.

그런데 그 노래의 화음 진행을 그대로 쓴 곡이 수천 개다. 아무도 그건 문제 삼지 않는다.

무엇은 누군가의 것이 되고 무엇은 되지 않는가.

내려간 영상과 남은 수천 곡이 갈린다

저작권이 지키는 것은 착상이 아니라 그 착상의 표현(expression of an idea)이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 밤거리를 걷는다는 발상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런 발상은 공기처럼 자유롭다. 특정한 선율과 특정한 문장만 한 사람에게 묶인다.

영상이 내려간 건 그 사람이 슬픈 노래를 불러서가 아니다. 그 선율 그대로를 불러서다. 남은 수천 개의 곡은 발상 쪽을 가져갔고, 내려간 영상은 표현 쪽을 가져갔다.

보호를 세게 조일수록 다음 노래가 막힌다

왜 하필 거기서 자르는가. 권리를 준 목적을 보면 답이 나온다. 창작을 북돋우려고 준 독점인데, 그 독점이 다음 사람의 창작을 막으면 애초의 목적을 배반한다. 모든 창작은 앞선 창작을 재료로 쓴다.

보호기간에 끝이 있는 것도 그래서다. 기간이 끝난 작품은 공유재(public domain)로 넘어가 누구나 쓴다. 아주 오래된 노래를 불러 올린 영상은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감추고 버틸지 공개하고 독점할지 고른다

새 기술을 지키는 길은 둘이다. 특허 보호(patent protection)는 내용을 남김없이 공개하는 대가로 한동안 독점을 준다. 영업비밀법(trade secret law)은 반대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대신 기한이 없다. 다만 남이 스스로 알아내면 그날로 끝난다.

오래 감출 수 있는 배합이나 공정은 뒤쪽을, 뜯어보면 드러날 기계는 앞쪽을 고른다. 노래에는 뒤쪽 길이 아예 없다. 들려주지 않으면 노래가 아니어서, 감추는 방식으로는 지킬 것이 남지 않는다.

체스 판 위에서 규칙이 경기를 만들어 낸다

교통 규칙은 이미 있는 행위를 제약한다. 규칙이 없어도 운전은 있다. 체스의 규칙은 다르다. 그 규칙을 지키는 일이 곧 체스를 두는 일이 된다.

규칙을 어긴 사람은 체스를 못 두는 게 아니라 체스를 두지 않는다. 앞을 규제적 규칙, 뒤를 구성적 규칙이라 한다. 하나는 있던 행위에 제한을 걸고, 다른 하나는 그 행위를 처음부터 있게 한다.

저작권도 뒤쪽이다. 노래를 누군가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규칙이 없었다면 영상을 내릴 일도, 침해라 부를 일도 생기지 않는다.

법에는 뒤쪽이 많다. 어음(negotiable instruments)이나 유언장은 법이 정한 형식을 갖출 때 비로소 생긴다. 어떤 형식을 갖추면 어떤 효과가 생기는지 조문에서 바로 읽어 내는 훈련은 법조문 읽는 법 — 조건절과 결과절, 요건과 효과에서 요건과 효과라는 짝으로 다룬다.

영상 앞에 뜬 안내문을 아무도 끝까지 안 읽는다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못 박는 규제 명령(regulatory mandate)이 있고, 열량이나 연비처럼 사실을 알리게만 하는 정보 공개(disclosure)형 규제가 있다.

뒤쪽은 선택의 자유를 남긴다. 그래서 더 낫다고들 한다. 다만 표시가 늘수록 아무도 읽지 않는 역효과가 따라온다. 영상을 올리기 전에 뜬 긴 안내문을 끝까지 읽은 사람도 많지 않다.

파는 쪽과 사는 쪽이 아는 것이 다르다는 정보 비대칭과 역선택 — 위험과 정보의 경제학, 보험과 시장 실패의 정보 비대칭이 그런 규제를 애초에 부른다.

물론 두 규칙의 구분이 늘 깨끗하지는 않다. 교통 규칙도 오래 지키다 보면 '운전한다'는 말의 뜻 자체를 이룬다.

법을 다룬 글 앞에서 던질 물음은 무엇이 금지되었는가가 아니다. 이 권리를 왜 주었고 어디서 끊었는가, 그 선이 애초에 주려던 것을 아직 지키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