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인식론 정리 — 인식의 조건과 자아의 동일성
칸트는 대상이 우리 인식에 찍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틀이 대상을 경험으로 만든다고 본 철학자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원인과 결과 같은 지성의 개념을 통과한 것만 경험이 되며, 인식의 조건을 실재하는 실체와 바꿔치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 사람이 서랍에서 오래된 사진을 꺼낸다. 예닐곱 살 무렵의 자기 얼굴이다. 그때의 몸은 남은 것이 거의 없고 그때의 기억도 대부분 사라졌다.
그런데도 그 아이를 가리켜 나라고 말한다.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목적을 걷어 낸 자연은 물질의 운동으로 풀린다. 그런데 그 설명을 하는 쪽은 여태 아무도 정리하지 않았다. 자연에서 목적을 걷어 내기까지는 목적론과 기계론 정리 — 자연을 설명하는 두 방식에 있다.
감각이 앎의 재료를 전부 댄다면, 원인과 결과라는 연결도 자주 붙어 나오는 걸 보다가 생긴 습관일 뿐이다. 경험론은 여기까지 밀려갔다.
칸트가 방향을 거꾸로 돌린다
대상이 우리 인식에 자기 모습을 찍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틀이 대상을 경험으로 만든다.
감각이 들어오는 통로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이 이미 깔려 있다. 그렇게 들어온 것을 하나로 묶는 데는 원인과 결과 같은 지성의 개념이 쓰인다. 이 틀을 지난 것만 우리에게 경험이 된다.
손에 든 사진도 그렇다. 종이는 지금 여기 있고 찍힌 얼굴은 오래전 다른 곳에 있었다. 앞뒤와 여기저기가 미리 깔려 있지 않으면 그 둘이 한 장면으로 묶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은 언제나 현상이다. 현상은 우리 틀에 맞춰 나타난 모습이고, 그 틀을 거치기 전의 것 자체는 알 수 없는 자리에 남는다.
"인식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사진 한 장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들어온다
자기의식이 그 시험대에 오른다. 사진을 보는 지금도 종이의 누런빛과 아이의 얼굴과 서랍의 먼지 냄새가 따로따로 들어온다.
이것들이 한 장면이 되는 것은 전부 내가 지금 겪는 것으로 묶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본다는 의식이 낱낱의 표상마다 따라붙을 수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이 묶어 내는 자기의식을 통각이라 불렀다. 흩어진 표상을 나중에 그러모으는 일이 아니라, 어떤 표상이든 처음부터 내 것으로 성립하게 하는 자리다.
통각은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다. 경험이 서려면 앞서 있어야 하는 조건이다. 사진을 다 보고 나서 알아낸 것이 아니라, 사진을 한 장면으로 보려면 이미 돌아가고 있어야 한다.
하나로 묶는 의식 밑에서 영혼을 꺼내려 든다
그러면 이런 추론이 따라 나온다. 나를 나로 아는 이 의식은 언제나 하나다. 그러니 그 밑에 하나로 지속하는 실체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영혼이다.
칸트는 이 추론을 끊는다. 자기의식이 하나라는 것은 사고의 형식이 하나라는 말이다. 그 형식을 떠받치는 실체를 어디선가 봤다는 말이 아니다. 조건을 실재로 바꿔치기한 셈이다.
사진 속 아이와 나를 잇는 끈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진 속 아이를 나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 밑에 하나로 이어져 온 무언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영혼이라는 실체를 이론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 끈을 거기서 가져올 수는 없다.
형식이 같다고 그 형식을 갖는 존재가 하나로 이어진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사진을 보는 사람과 사진 속 아이가 같은 방식으로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과, 그 둘이 한 존재라는 것은 다른 말이다.
이론에서 놓친 자아가 도덕에서 되살아난다
증명하지 못한다는 말과 없다는 말은 다르다. 칸트에게 자아는 이론의 영역에서 실체로 잡히지 않을 뿐이다. 스스로 법칙을 세우고 그 법칙에 따르는 주체로서, 자아는 도덕의 영역에 다시 선다.
칸트는 우리 틀 밖의 것을 알 수 없는 자리로 남겨 두었다. 그렇게 남겨 둔 자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밀고 나간 것이 헤겔 변증법 정리 — 지양과 절대정신, 예술의 자리다.
그가 남긴 것은 두 개다. 조건과 실재를 가르는 칼, 그리고 전제 두 개가 참이어도 결론이 따라 나오지 않는 자리를 짚어 내는 방식이다.